아이폰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남로당 3 14,759
  

1279272674.jpg


믿을 수 없게도 한때 우리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을 살았었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삐삐라 부르는 호출기조차도 없던, 그래서 전화라고는 오직 집 전화와 공중전화 밖에는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집 전화는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어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화기와 송화기는 꼬불꼬불한 줄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전화기 앞에 딱 붙어서 전화를 받아야 했으며, 어쩌다 전화벨이 울리면 화장실에 있다가도 전속력으로 달려가 받아야 했다. 왜냐면 발신자 표시 같은 게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리는 전화를 받지 못하면 도무지 누구에게서 전화가 왔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전화를 걸기 위해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닌 숫자가 찍혀있는 동그란 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고 돌려야만 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전화기를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엔틱한 소품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가질 뿐이다.

 

그 시절 우리는 아무도 약속에 늦지 않았다. 상대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이라고 뻥을 치지도 않았고, 지금 요 앞에 사고가 났는지 차가 영 빠지질 않아서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 할 수도 없었다. 더 중요한 건 기다리는 쪽에서 '너 어디야?' 라는 재촉 전화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상대가 집 밖으로 나와 버리면 그 사람과 통화할 길은 요원했다. 그래서 그때는 상대가 약속에 늦으면 온갖 불길한 상상을 하며 기다리거나 아니면 난 절대 약속에 늦는 인간 따위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라는 철칙에 따라 많이 봐줘서 5분 정도만 기다리고는 휑하니 가버리기도 했다.

통화중 대기라든지 캐치 콜 같은 것도 없어서 어쩌다 길게 통화를 하면 나에게 전화를 건 또 다른 누군가는 끊임없이 뚜뚜뚜뚜 하는 통화중 신호음을 듣다가 마침내 연결이 되면 누구와 그렇게 오래 통화했는지 폭발하기도 했었다. 주로 그렇게 폭발하는 것은 부모님들이었으며, 통화요금 고지서가 날아오기 전까지의 자식들은 대부분 '난 진짜 금방 끊었어' 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가끔 자식들이 많은 집안에서는 서로 자긴 전화를 오래 쓰지 않았다며 발뺌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직접 전화국에 가서 통화 내역을 뽑아 와서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번호 하나 하나를 불러가며 족치기도 했었다. 그러면 대게 가장 억울해하던 자식이 가장 많은 통화를 했음이 밝혀지고 마침내 다른 자식들은 광명을 얻었다.

허나 방심은 금물. 부모들은 이내 2순위로 통화 많이 한 놈, 3순위로 많이 한 놈을 잡아내어 니들도 조심하라고 경고를 내리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전화요금이 최고 15만원이 나왔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건 데 그때가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위기였었다. 왜냐면 주범이 나였다. 것도 같은 시외 번호로만 계속. 통화 내역을 뽑아보기 전까지 아빠는 누군가가 중국에 전화해서 자장면을 시켰거나 뉴욕에 전화해서 피자를 시키지 않는 한이 전화 요금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었다.

 

1279277129.jpg

 

전화기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전화를 받거나, 아님 전화를 걸거나.

전화를 통해 텍스트를 주고 받을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는 이메일도 없이 손으로 쓴 종이 편지가 존재하기도 했으니까.

 

전화기 옆에는 항상 메모지가 있었다. 누군가가 부재중일 때 대신 받은 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나빴으므로 '너한테 전화 왔는데 그 김 누구라더라' 하는 소리를 하는 것 보다 차라리 적는 게 안전했다. 물론 대부분의 전화는 메모가 그다지 필요치 않은 시답잖은 전화가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목숨을 걸곤 했었다.

 

그 당시에는 집집마다 두꺼운 전화번호부 같은 게 있었는데 이는 전화기에 번호를 저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번호는 대게 외웠었고 확실히 그 시절 치매 환자들은 훨씬 적었었다.

 

아주 가끔 괴상한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이름을 가지고 놀림을 받다 받다 못해서 전화국에서 발행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펴 놓고선 자신과 같은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찾기도 했었다. 그리고 물론 나 같이 전혀 찾을 수 없는, 그리하여 이 대한민국 땅에는 나처럼 이상한 이름을 가진 인간은 나 하나 뿐이라는 처절한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불행한 어린이도 있었다.

 

이 시절에는 놀랍게도 스팸이나 광고성 전화는 없었지만 그 만큼의 장난 전화가 빗발치는 시대였다. 대게는 초등학교 때 이런 장난을 치곤 하는데 지금 잘 나가는 배우 모양은 나와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 장난을 쳤었다. (난 구경만했다. 진짜 안했다.)

장난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했다. 가끔 엽기적 코드를 가진 인간들은 '지금 내 몸이 불타고 있다' 는 그 유명한 대사를 날리기도 했으나 사실 받는 쪽에서 보자면 그다지 유머러스하고 재기 발랄한 장난 전화는 아니었다.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열 받게 하는 전화는 뭐니뭐니해도 전화해서 암말 없이 숨소리만 씩씩 들려주는 전화였다. 그러면 상대방은 아주 바짝 약이 올라서는 너 누구냐부터 시작해서 잡히면 죽는다 까지 온갖 악담을 퍼붓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화비를 써 가며, 이 쪽에서는 말 한마디 못한 채 단지 악담을 듣기 위해 전화를 한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때는 그게 무척이나 흥미롭고도 중요한 일이었다.

 

헤어진 연인들은 발신자 표시 감춤 같은 스킬 없이도 그냥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일단 말만 안 하면 상대방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나 용케도 그들은 몇 번의 '여보세요' 와 '누구세요' 끝에 '너 누구누구지' 하며 맞춰버리는 바람에 당황한 나머지 이쪽에서는 확 끊어버리는 실수를 해서는 상대방에게 물증은 없으나 확실한 심증을 남기는 멍청한 짓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받은 최고의 로맨틱한 장난 전화는 말없이 계속 음악만 들려주는 전화였다. 덜그럭 거리며 카세트 테이프 갈아 끼우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려주면서 아주 지가 알고 있는 혹은 좋아하는 온갖 음악을 무척 나쁜 음질로 들려주었었다. 처음에는 그냥 끊었다가 나중에는 나도 그냥 계속해서 받았다. 상대가 고르는 음악이 그닥 나쁘지 않기도 했지만 니 전화세 나오지 내 전화세 나오냐 라는 감정이 영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가끔 부모들은 자식이 학교를 파하고 곧장 집으로 갔는지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전화를 이용하기도 했고 늦게 들어가는 여자친구를 걱정하사 9시만 되면 칼같이 전화를 거는 남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집에서 오는 전화를 핸드폰으로 돌려놓을 수도 없었으므로 집에 없으면 바로 뽀록이 났다. 그들은 철저하게도 단 한번만 전화를 하는 게 아닌 시간차 공격을 했고 이쪽에서 '어, 화장실 갔었는데' 라든가 '잠깐 슈퍼에' 같은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대게 자매들이 많은 집에는 전화가 오면 서로 받기 위해 난리가 났다. 다들 틀림없이 자기네 그이라는 것이었다. 발신자 표시도 없는데, 그 시간에 전화 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다들 초능력자라도 되는 것처럼 이번 전화는 틀림없이 자기 전화가 맞다고 우겼다. 그러나 막상 받아보면 잘못 걸려온 전화거나 부모님을 찾는 친척의 전화여서 일제히 허탈감을 느끼며 주로 전화기가 있는 거실 소파에 무너지듯 내려앉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 시절 대부분의 전화기에는 '용건만 간단히' 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곤 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의 대부분은 절대 용건만 간단히 말하지 않았다. 왜냐면 배터리가 떨어지거나 전화기가 뜨끈뜨끈해지는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통화 요금이 그렇게 살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절의 가장 좋은 점이라면 남의 돈 떼어먹고 잠수 타기가 참 수월했다는 것이다. 이사를 가 버리면서 전화번호를 바꾸어 버리면 114에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은 전화를 설치하면서 결정한 전화번호를 이사를 가서 어쩔 수 없이 번호 변경을 해야 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사용했다.

 

1279276004.jpg

 

누군가가 너무 오랫동안 전화를 받지 않으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상대가 죽었거나 다쳐서 입원을 했다고 생각했으며 대게는 그게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전화를 받아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마침내 무선 전화기가 들어오던 날은 온 식구들이 오만 곳의 장소에서 오만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잘 들리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 벽돌 두 개는 합쳐 놓은 듯 큰 무선 전화기는 그토록 긴 안테나가 무색하게도 본체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지지직거리며 통화 감도가 떨어졌다. 그래도 우리는 기뻐했다. 무려 돌아다니면서 전화 받는 게 어디냐며 세상 참 좋아졌다고 했다. 심지어는 개도 잘 훈련만 시키면 오는 전화기를 받아 주인에게 물어오는 재주를 부릴 수도 있겠다는 희망찬 TV광고도 등장했다.

후에 무선 전화기는 꾸준한 발전을 거쳐서 마침내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지금은 외출 중이오니 삐 소리가 나면 메모를 남겨 주세요'를 통해 드디어 부재중에도 중요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험험 기침을 하거나 어...저...하며 사람이 받지 않은 전화기에다 대고 혼자 지껄이며 메시지를 남기는 것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려 이 전화의 메시지를 저장된 기계음이 아닌 사용자의 목소리로 대신 하는 게 가능했는데 그때는 서로 녹음을 하겠다며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으나 결국은 아버지가 에또.. 어쩌고 하면서 몇 번이고 고쳐 녹음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 내용을 녹음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 삐삐마저도 없던 시절 전화라고는 오직 집 전화와 공중전화만 존재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아이폰 같은 건 시간 여행이 가능한 먼 미래에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Comments

읽는 내내 내 어릴적 80년대를 상상하고 있었다네-
90년대 까지만 해도 이랬던것 같은데요 ㅎㅎ
옛날 생각 많이 나네요
얼마전 친구가 약속장소에 20분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는데 5분뒤 친구가 전화와서 미안하다고 지금 도착했다고 했었는데...
그때 "휴대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였다면.. 난 여전히 화난 상태로 집에 갔을거고.. 친구는 미안해서 우리집까지 왔을꺼고.."
등등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는데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1226 죄와별 [죄와별] 데이트 강간 댓글8 남로당 12.14 32649 5
1225 당원통신 [당원제보] 보린고비 설화 댓글10 돈까쯔 08.26 21404 17
1224 논평과 단신 [분노] 2011년... 아직도 음란물 논쟁을 해야 하는가? 댓글3 남로당 07.29 24146 2
1223 파주졸부의 F다이어리 2011 新 아메리칸 드림 [파주졸부의 F다이어리] 댓글4 남로당 07.28 19864 7
1222 무비 스토리 [Space Monkey] 외로운 우주공간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 남았나 (1) 남로당 07.27 14794 3
1221 파주졸부의 F다이어리 찌질한 너에게 홍대 클럽이란~ [파주졸부의 F다이어리] 댓글6 남로당 07.25 60914 4
1220 무비 스토리 [Space Monkey] 외로운 우주공간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 남았나 (Intro) 남로당 07.22 14615 4
1219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사랑은 게임이며 당신은 선수이다? - The Game 남로당 08.04 16032 6
1218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팔랑귀를 위하여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2 남로당 07.23 16110 5
1217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 500일의 썸머 남로당 07.21 16093 5
열람중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아이폰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3 남로당 07.09 14760 6
1215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헤어진 다음 날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3 남로당 06.17 15982 9
1214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세상의 고민 없는 사랑은 없다. - 愛(애)피소드 남로당 06.16 16508 5
1213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2 남로당 06.14 15887 6
1212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헤어진 연인들에게 남아있는 것들 - 멋진 하루 남로당 06.10 14828 5
1211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2 남로당 06.07 11908 5
1210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여자라서 행복한가요? 불행한가요? - 영애씨 문제는 남자가 아니야 남로당 06.03 14666 5
1209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나는 소망한다. 이런 남자를..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4 남로당 05.31 11872 5
1208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내 남자의 여자들과 친구 되기? - 걸프렌즈 남로당 05.26 12888 5
1207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매미’에서 ‘달팽이’까지 [블루버닝의 S 다이어리] 댓글2 남로당 05.10 7250 4
1206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반짝, 하고 빛나는 순간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6 남로당 04.16 10748 4
1205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왜 하필 그녀이고, 왜 하필 그 여야만 하는가 - 나는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남로당 04.15 12556 5
1204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다양성에 대한 인정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2 남로당 04.13 9741 5
1203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반쪽짜리 사랑 - 중독 남로당 04.07 11958 5
1202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이토록 아름다운 스무 살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3 남로당 04.02 11231 7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