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내비게이션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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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의 일이다. 지금처럼 그다지 성능이 좋지 않은, 그리고 차 마다 다 달려 있지도 않은 고가의 내비게이션 을 나는 망설임 없이 구입했었다. 워낙 길치여서 늘 가는 길 이외에는 아예 차를 끌고 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나에게 당시 내비게이션 은 필수품이었다. 내비게이션을 처음으로 달았던 그 날 나는 기념으로 부산 해운대를 가기로 했다. 꽤 먼 거리인데다 부산은 길 찾기가 까다롭다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내비게이션 하나를 믿고 굳건하게 고속도로를 달렸다.

과연 내비게이션은 제 값을 했다. 길을 3D로 보여주는 지금에 비하면 평면에 밋밋하기 그지없는 화면이었지만 그래도 내 차를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위성 어디에선가 찾아내어 그 위치를 알려 준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그리고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수 차례 듣기는 했지만 어쨌건 나는 한 밤중에 부산 해운대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바닷가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그 차 안에서 밤을 새웠다. 원래 계획은 나가서 바다를 잠깐 본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더는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새벽녘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태양이 서서히 바다 너머로 떠오르고 있었다. 비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침을 바다와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맞이하고 나니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3번 내비게이션을 교환했다. 지금의 내비게이션은 모양도 예쁘고 네온도 들어오며 무엇보다 초창기 딱딱한 나레이션에서 조금 더 친절해진 목소리로 길 안내를 해 준다. 그 뿐인가. 3D 버튼을 누르면 건물들이 쑤욱 솟아올라 그 길을 진짜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제법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 사이 프로그램도 많이 업데이트가 되어서 이제 표시되지 않는 건물 이름 같은 건 거의 없다. 그래서 엄청난 길치인 나도 내비게이션만 켜면 조금은 안심을 하며 차를 출발시킨다.

 

가끔 인생이 삐걱거릴 때면 내 인생에도 이런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전방 300m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하듯 '약 3일 후에는 감기에 걸립니다.’ 라든지 ‘전방에 과속방지 위험 턱입니다.’ 하듯 ‘오늘부터 악재가 겹칠 예정이오니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 해 준다면. 가끔은 경로를 이탈했음을, 그리고 이탈한 경로에서도 어떻게 하면 다시 경로로 진입할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길치인 나는 세상사는 것에서도 비슷하게 버벅거린다. 그런 나에게 만약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생긴다면 가고 싶은 목적지를 설정하듯, 되고 싶은 것만 결정하면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내비게이션은 최단 경로를 알려 줄 것이 틀림없다. 어떤 내비게이션에도 어드벤처 모드라든가 니가 알아서 한 번 가 보세요 모드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다.

인생이 고달픈 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인생은 특히나 더 고달프다.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는 방법을, 더구나 잘 사는 방법은 더더욱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실수를 줄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인정은 둘째 치더라도 욕이라도 안 먹을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뭘 해야 행복한지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초보 운전자처럼 운전대 앞에 상체를 바짝 당긴 채 액셀을 밟아야 할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아마 운전을 서른 해 넘게 했다면 내비게이션 따위는 필요 없는 인간 지도가 되어있겠지만 아직까지 나는 내 인생의 운전에 있어서는 초보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뒤 유리창에 ‘초보운전’을 붙이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초보운전자를 보고 배려를 해 주기는커녕 ‘운전도 못하면서 차는 왜 끌고 나왔대?’ 하고 짜증을 내는 것처럼 내 주변의 베테랑 인생 운전자들은 내 인생을 조금도 도와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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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살면서 부모님께 기대고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었다. 대학을 막 들어가고 호기롭게 독립을 외쳤을 때도, 생각 없이 써댄 카드 값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일 때도, 느닷없이 직장에서 잘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어 빌빌거릴 때도, 아프거나 사랑에 실패를 했을 때도 나는 안전하고 따뜻한 부모님께 달려가서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달라고 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독립을 외쳤던 이유는 둘러가든 아예 가지 못 하든 어쨌건 내 인생의 목적지는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가끔은 그 분들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내 인생이 편해지는 대신 당신들의 인생이 피곤해졌을 것이다.

여태 그래왔지만 아직도 내 인생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과속 방지 턱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들이박거나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 온 몸이 휘청일 정도로 덜컹거린다. 가끔은 내비게이션은 고사하고 어디 용한 무당이라도 찾아가서 대체 이 삽질은 언제쯤 끝이 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 6개월 앞 밖에는 내다볼 수 없다 하더라도 타로 카드 점이라도 쳐 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저런 것들을 한 번씩 해 본 결과, 나도 알지 못하는 내 미래는 역시 그들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과거는 잘도 맞추면서 내 앞에 펼쳐질 무언가에 대해서는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싶을 만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애매한 얘기만 해댈 뿐이었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꿈꾸지 않는다. 왜냐면 실제로 가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최단거리나 안전속도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고 언제쯤 성공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그냥 내 인생에 시동을 걸고 달릴 뿐이다. 가끔은 걷는 속도로 또 가끔은 규정 속도를 어기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가다가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가 나온다는 것, 그것 하나만 믿을 뿐이다.



Comments

ㅎㅎ 잘 봤습니다. 네비게이션 그거 좋네요. 저도 한대 있었음하는 바램~
가슴 먹먹해지는 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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