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아니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었다. 남들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옳다고는 생각했으며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내가 잘 설명을 하면 그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바꾸리라 믿었다. 때로는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했으며 나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좋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 인간성이랄 지 그 사람이 지닌 기질보다는 그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지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풍부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조금씩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를 떠나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만큼 수많은 생각들과 다양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명백하게 남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라던가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분노나 공격이 아닌 다음에야 그르다는 생각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나는 사람을 볼 때 학벌이나 프로필을 좀 보는 편이었다. 남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진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큰 조건이었다. 조금 못생기거나 성격이 나쁜 건 참았지만 초라한 학벌과 프로필을 동시에 갖고 있다면 아예 재고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 나는 그 좋은 학벌과 프로필을 가졌으나 너무 괴팍한 성격에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과 대화를 적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으며 오만하며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한 사람 사람들 때문에 학벌과 프로필이 좋은 사람들 전체를 폄하해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던 나에게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의 가능성을 열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좋게 말하자면 나를 가르치려 들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어린아이 놀리듯이 가지고 놀고 있었다. 결코 학벌이 좋지도 그렇다고 아는 게 많지도 않은 나는 적어도 바보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열심히 내 생각을 말했지만 그는 곧 전문용어와 해박한 지식으로 나를 눌렀다. 게다가 그는 결코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그 보다 아는 게 없는 나지만 대화 도중 몇 번 정도는 내가 하는 말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웠으나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와는 반대로만 얘기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내가 어떤 소리를 해도 그는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만 펼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너무 똑똑해서 괴변조차 그럴싸한 말로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 하긴 했지만 우린 분명히 말로써 싸우고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거나 남의 말을 가로막거나 하는 일 없이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목청 높여 싸우는 사람들보다 더 한 날이 서 있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했다. 어떤 말을 해 봐야 이 사람은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그는 달랐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해 왔던 사람들처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투는 조금도 빨라지거나 떨리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가 나와 헤어지면서 말했다.
‘언젠가 일 문제로 어떤 여자와 통화를 했는데 그 여자가 펑펑 울더라구요. 난 화내거나 소리 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아, 네 그러세요. 라고 말 했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걸 정말 모르겠냐고. 그 사람이 생각하는 나쁜 것은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 나쁜 것이지 자기처럼 화만 내지 않으면 그게 나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주변에 언제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 말이 통하는 사람들만 두려고 했었다. 어떤 부분이 닮아있거나 공통 관심사가 있거나 혹은 대화가 매력적이지 않으면 나는 그런 사람들을 두 번 보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세 번은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내 입으로 말 하면서도 나는 그런 사람들은 세 번 볼 필요도 없으며 세 번을 봐도 똑같을 뿐이니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 매력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마다의 색이 있고 또 생각이 있었던 그 사람들은 어쩌면 알고 지냈으면 좋은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가끔. 정말 대화를 하다가 보면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과거의 나는 그런 사람들을 그냥 앞에서만 맞춰주는 척 하다가 뒤 돌아서서는 혼자 욕하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똑똑하다는 것, 많이 안다는 것, 유식하다는 것은 대체 뭘까? 뭐가 기준이고 누가 기준일까?
나는 취향이 독특한 사람들도 싫어했다. 치렁치렁 옷을 늘어지게 입는다든지 요란한 액세서리를 걸치고 있으면 정신이 좀 산만한 사람들 같았다. 오죽 주목 받을 일이 없으면 저렇게 차림새로 난리를 칠까 하고 딱하게 생각했고, 그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취향은 취향일 뿐이고, 그것은 때에 따라서 남들과 다를 수 있다. 나 역시 누가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특이한 인간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고 매력 없이 밋밋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고 또 어떻게 보면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고 산다. 그런데 완전 반대되는 사람, 혹은 자신이 평소 좀 경멸하던 타입의 사람을 인정한다는 그만큼 넓은 마음의 폭을 가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그 누구도 무시할 만한 인간은 없다, 혹은 내가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다. 그 동안의 나는 대놓고 무시한 적은 없었지만 늘 속으로 욕했으며 그런 사람들이 좀 무안할 만큼 빤히 쳐다본 적도 있었었다. 그러나 세상은 넓었고, 내가 모르는 것도 많았으며, 더구나 내가 알고 있는 것 마저 진리는 아니었다. 그걸 이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릴 때는 그게 참 힘든 일이었다. 누군가를 무시하지 않거나 험담하지 않는 일이 힘들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싫은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어릴 때의 나라면 과연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은 것도 생각하게 되고 좀 더 마음이 넓어졌다. 물론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내 지난날들과의 비교이니 남들에 비해 넓은 마음을 가졌다고는 절대 말 할 수 없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그건 어쩌면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서야 완성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부터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해간다면 나이가 든 나는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