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스무 살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남로당 3 11,061
  

1270179153.jpg


오래 전 TTL 광고에서 눈이 왕방울만한 소녀 임은경은 빨간 토마토를 맞으면서 말했다. ‘스무 살’ 다른 어떤 말도 아닌 스무 살. 그때는 몰랐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말 하고 있는지, 또 어떤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저 그 광고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라고는 아무리 토마토라지만 저렇게 맞으면 좀 아프지 않을까? 눈에라도 들어가면 따갑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임은경이 ‘살’ 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동그랗게 말리던 혀만 기억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스무 살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지를.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내가 이미 지나온 스무 살 시절이 그토록 소중했다는 것을. 왜 사람은 항상 지나고 나면 모든 걸 알게 될까? 왜 그 순간에 나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알지 못할까? 지금 시시하다고 생각되는 내 서른 살이 나중에 마흔이 되고 쉰이 되면 역시 그때는 지금보다 행복 했었어 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스무 살의 나는 갓 대학생이 되었고 내 인생 최초의 독립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살던 원룸은 주민들 사이에서 독신자 아파트라고 불리고 있었다. 우리는 독신자 라고 말 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어쨌건 그렇게 불렀다. 누가? 왜?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원룸촌은 독신자 아파트였다. 내 원룸 안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다. 건축법상 바닥의 4분의 1되는 크기의 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정말 충실하게 지킨 창이었다. 그 창 바로 옆에 나는 오디오를 설치하고 어디선가 흔들의자를 구해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비가 오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마음으로 그 흔들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내리는 빗소리는 음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내리는 비를 볼 수 있고 그 습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었다. 오아시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그 원룸 창 밖으로 내리는 비는 나를 촉촉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음악을 정말 제대로 들었었던 것 같다. 일단 새로운 CD를 사고 나면 최대한 편한 옷을 입고, 배가 고프지도 부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그 음악을 들었다. 처음에는 베이스 소리만 듣다가 다음 번에는 기타, 그 다음에는 피아노나 신서사이저, 그 외에 효과음들, 코러스, 보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시 이 음악을 들었다 라고 말을 하려면 저렇게 다 쪼개어서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렇게 말 했었다. 스쳐 지나가듯 들은 음악들은 내게 아는 음악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매 순간을 참 성의 있게 살았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함께 알바를 하던 친한 알바생들과 우루루 몰려가서 생맥주에 마른 오징어를 먹곤 했다. 그때 우리가 가던 술집은 너무나 허름해서 이거 마시다가 무너지면 시신도 못 찾는 거 아니야? 하는 농담을 주고받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맥주는 너무 차고 맛있었고 가격은 우리의 얇은 주머니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쌌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섞여 있었지만 누가 누굴 좋아하고 어쩌고 하는 썸씽은 없었다. 그저 우린 그렇게 그냥 우루루 하고 가서는 와 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 게 좋을 뿐이었다. 각자 일을 시작한 날들이 달라서 알바비가 나오는 날은 제각각 이었고 일주일에 한번 혹은 두 번은 누군가가 알바비를 받는 날이므로 우린 거의 거기서 살다시피 했었다. 단 한번도 누군가가 이번에는 쏘기 힘들 것 같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늘, 그리고 항상 알바비를 쓰는 가장 첫 번째는 그 생맥주 집이었다.

내 후배 중 한 명은 유진박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공연을 나와 함께 보러 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없는 돈을 쪼개어 겨우 표를 사고 그녀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사실 그 공연을 보기 전 까지 나는 유진박이 누군지도 몰랐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거기서 감동을 받고 말았다. 마지막에 긴 줄을 서서 싸인을 받을 정도로. 그때 유진박이 어설픈 한국어로 말했다. ‘로맨틱하게 생겼어. 당신 로맨틱하게 생겼어. 봐봐 로맨틱하지 않아?’ (다른 스텝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으나 그들은 뚱했다.) 그 후로 나는 예쁘지는 않지만 스스로 로맨틱하게 생겼다고 굳게 믿어버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그가 말 했으므로 무조건 믿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알던 세션하는 오빠들이 있었는데 이 오빠들은 지방에 공연이 있을 때 마다 나에게 공짜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곤 했었다. 신해철부터 이승환까지 그 오빠들이 하는 공연은 참으로 다양했었다.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제일 앞자리에 서서 정말 미친 듯이 열광하며 공연을 즐겼었다. 나이트에 가도 이보다 더 뛸 수는 없겠다 싶을 만큼. 정말 최선을 다해 뛰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고도 우리는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다시 노래방을 찾아가서 그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다시 불렀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들만의 콘서트였다. 관객은 없지만 부르는 가수들이 미쳐 날뛰는.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당시 나는 나이트클럽을 꽤나 좋아했었다. 강남 일대에는 우리가 갈 만한 나이트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죽순이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지만 간혹 몸이 찌뿌둥해서 한번 흔들어야 하는 거 아냐? 하는 날이면 멤버들을 모았다. 그때 우리의 복장은 예쁜 옷, 혹은 조명발 잘 받는 옷이 아니었다. 운동화에 청바지. 그리고 흰 남방에 검은 선글라스. 우리가 찾아낸 춤추기 가장 좋은 복장이었다. 우리는 그 수많은 여자 아이들 속에서 결코 예쁘지는 않았지만 정말 작정하고 춤추러 온, 미친 듯이 춤을 춰대는 애들이었다. 부킹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우린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오직 춤을 추기 위해서 갔으니까.

매일 밤이면 나는 꼬박꼬박 라디오를 들었다. 지금이야 내가 하는 방송의 모니터 조차도 하지 않지만 그때는 라디오가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 쇼를 비롯해서 김현철이나 공일오비의 장호일이 하던 라디오는 무조건 들었었다. 라디오라는 것이 TV와 달라서 대중을 상대한다기 보다는 오직 나에게만 얘기를 해 주는 것 같은 친밀함이 있었기에 나는 그들과 1:1로 마주앉아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김현철이 진행하는 라디오 쇼에 사연을 보냈고, 그 사연이 채택이 되어서 On & On 이라는 여성복 브랜드의 십만 원짜리 상품권을 받기도 했다. 나에게 그 상품권을 준다며 김현철이 말 하는 순간 내 친구와 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방방 뛰었었다. 그리고 상품권이 도착하기 무섭게 매장으로 달려가서 어떤 옷을 살지 고민했다. 그러다 평소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던 내게 친구는 ‘여성스러운 옷을 사봐. 맨날 바지만 입지 말고’ 라고 권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옷은 살구색 원피스였다. 스판 재질이라 몸에 딱 붙는데다 치마 길이가 약간 짧았기 때문에 많이 망설였지만 친구도 점원도 모두 어울린다는 얘기에 그냥 그걸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남자 친구는 나에게 예쁘다고 말해줬고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1270184860.jpg

 

지금처럼 커피 전문점이 아닌 그냥 커피숍만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커피 맛 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다. 세상에 커피는 아메리카노와 자판기 커피 딱 두 종류만 존재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자주 커피메이커에 물인지 커핀지 구분도 안 갈 만큼 연하게 커피를 내려서 냉동실에 넣어 차가워진 말보로 미디움을 피우며 커피를 마셨었다. 지금은 더 비싼 커피를 사 마시거나 더 좋은 원두를 쓸 수 있지만 그때의 커피 맛은 좀처럼 잊혀지지가 않는다. 담배도 마찬가지. 얼마 전 문득 떠올라 냉동실에 넣었다가 피워봤는데 약간 차갑다라는 느낌뿐이었다. 그땐 그 느낌만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KTX가 없던 시절. 참 용감하기도 하지. 나와 내 친구는 부산까지 무궁화 호 입석을 끊어서 내려갔다. 용케 자리가 비면 잠깐 앉았다가 누군가가 표를 들고 오면 다시 일어나서 서 있기를 얼마나 오래 반복했는지. 그래도 우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직 밤 바다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오랜 기차 시간을 버텼다. 그 와중에 기차 여행에는 역시 달걀과 사이다라며 삶은 달걀을 서로의 머리에 쳐서 깨먹고 사이다도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부산의 밤 바다는 너무 근사했었다. 지금은 노보텔 자리인 그 곳을 우리는 우리만의 해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참 많은 얘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얘기 아니지만 그땐 바다보다 깊고 세상 모든 것만큼이나 진지했었다.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했고,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았던 시절, 가진 게 없어도 불안하지 않던 시절, 통장 잔고에 예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시절, 내 미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펼쳐지리라 믿었던 시절, 컴컴한 골목길을 겁도 없이 돌아다니던 시절, 겨울이면 패딩 코트 하나로 버텨도 옷이 없다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 단 하나뿐인 가방을 메고 학교도 놀러도 여행도 다니던 시절, 좋아하는 음악을 집에서 CD에서 다시 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남자친구에게 선물하던 시절, 한 권의 책을 사면 그 한 권을 정말 아껴서 열심히 읽던 시절. 그래서 그 책이 책꽂이에 꽂히면 딱 그 부피만큼 행복했던 시절.

지금의 나는 훨씬 더 좋은 것,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때에 비해 가진 것도 엄청나게 늘었고 정년퇴직이 따로 없는 밥벌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만큼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행복이라기보다는 그때처럼 내 스스로 모든 것에 감동을 느끼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뭘 해도 약간은 시큰둥하고 조금만 앉아 있으면 그냥 집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의 매일 밤 늦게 자고 약속이 없는 한 늦게 일어나며 사람들은 전화를 해서 저마다 손가락이 부러졌냐 왜 전화를 안하고 심지어 캐치콜이 떠도 리턴콜을 하지 않느냐고 원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기대를 하고 나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무게감에 짓눌려 살고 순간순간이 소중하다기 보다는 그냥 지나가는 시간에 내가 옷자락이 끼여서 딸려가는 느낌이다.

 

정말 그럴까? 이제는 내가 스무 살이 아니기 때문에 내 삶이 그리고 내 하루가 이렇게 시시해져 버린 걸까?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는 또 다시 그때처럼 살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가면서 늘어난 건 의심과 추억과 게으름뿐이다.



Comments

블루버닝 로맨틱  파문
읽는 내내 눈물이 나려고 해서.. 이거 원...
잠안오는 토욜....외롭고 슬프고 그립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1226 죄와별 [죄와별] 데이트 강간 댓글8 남로당 12.14 32283 5
1225 당원통신 [당원제보] 보린고비 설화 댓글10 돈까쯔 08.26 21203 17
1224 논평과 단신 [분노] 2011년... 아직도 음란물 논쟁을 해야 하는가? 댓글3 남로당 07.29 23945 2
1223 파주졸부의 F다이어리 2011 新 아메리칸 드림 [파주졸부의 F다이어리] 댓글4 남로당 07.28 19707 7
1222 무비 스토리 [Space Monkey] 외로운 우주공간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 남았나 (1) 남로당 07.27 14611 3
1221 파주졸부의 F다이어리 찌질한 너에게 홍대 클럽이란~ [파주졸부의 F다이어리] 댓글6 남로당 07.25 60162 4
1220 무비 스토리 [Space Monkey] 외로운 우주공간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 남았나 (Intro) 남로당 07.22 14462 4
1219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사랑은 게임이며 당신은 선수이다? - The Game 남로당 08.04 15764 6
1218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팔랑귀를 위하여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2 남로당 07.23 15860 5
1217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 500일의 썸머 남로당 07.21 15928 5
1216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아이폰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3 남로당 07.09 14553 6
1215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헤어진 다음 날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3 남로당 06.17 15787 9
1214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세상의 고민 없는 사랑은 없다. - 愛(애)피소드 남로당 06.16 16336 5
1213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2 남로당 06.14 15706 6
1212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헤어진 연인들에게 남아있는 것들 - 멋진 하루 남로당 06.10 14638 5
1211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2 남로당 06.07 11684 5
1210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여자라서 행복한가요? 불행한가요? - 영애씨 문제는 남자가 아니야 남로당 06.03 14443 5
1209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나는 소망한다. 이런 남자를..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4 남로당 05.31 11587 5
1208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내 남자의 여자들과 친구 되기? - 걸프렌즈 남로당 05.26 12690 5
1207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매미’에서 ‘달팽이’까지 [블루버닝의 S 다이어리] 댓글2 남로당 05.10 7032 4
1206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반짝, 하고 빛나는 순간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6 남로당 04.16 10526 4
1205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왜 하필 그녀이고, 왜 하필 그 여야만 하는가 - 나는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남로당 04.15 12376 5
1204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다양성에 대한 인정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2 남로당 04.13 9562 5
1203 리뷰 시리즈 [연애리뷰] 반쪽짜리 사랑 - 중독 남로당 04.07 11783 5
열람중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이토록 아름다운 스무 살 [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시즌 2] 댓글3 남로당 04.02 11062 7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